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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

이서(1580년(선조 13년)~1637년(인조 15년))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인숙, 호는 월봉이다. 효령대군의 후손이며, 목사 경록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행사용, 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1618년 (광해군 10년)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논의가 일어났을 때 정청에 불참하여 반대 의사를 보였다. 장단부사로 나가 있으면서 1623년 김류, 이귀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주도하였으며, 그 공으로 호조판서로 승진하고 정사공신 1등, 완풍군에 봉해졌다. 이어 경기관찰사로 나갔는데, 1624년(인조 2년)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관찰사로서 부원수를 겸하고 반란군과 싸웠으며 송도에서 적과 적극 싸우지 않는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곧 다시 기용되어 총융사로서 왕에게 남한산성의 수축을 건의하였고,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여 외침에 대비하였다. 인조는 그의 공로와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경연특진관으로 삼고 국방 문제를 항상 상의하였다.

1628년 형조판서를 거쳐 1632년 특명으로 공조판서가 되어 각처의 산성을 수축하였으며, 1636년 병으로 일시 사직하였다가 곧 훈련도감제조를 거쳐 다시 병조판서가 되어 군비를 갖추는 데 힘썼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영제조로서 국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정월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재촉하는 가운데 군중에서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남한산성의 온조왕묘와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식언해>, <마경언해> 등이 있다. 시호는 충정이다.

인조반정 당시 군사를 이끌고 홍제원에서 인조를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인조가 몸소 연서역까지 나와 이서를 기다렸는데, 그 때문에 뒷날 이 곳을 ‘이서가 지각한 곳' 이라는 뜻에서 연서라고 하였다거나, ‘신하를 늦게 만난 개천' 이란 뜻에서 연신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또 남한산성의 온조왕묘에 이서를 배향한 것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즉, 인조가 온조왕묘를 짓는데, 인조의 꿈에 온조가 나타나 고마움을 표하면서 “나 혼자 지내기는 너무 심심하니 이서를 같이 있게 해주시오.”하고 하자 인조가 허락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침에 잠을 깨니 이서가 갑자기 별세하였다는 부고가 전달되었고, 이렇게 해서 이서가 온조왕묘에 배향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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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최종수정일2022.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