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

한규설

한규설(1848(헌종14년)~1930년))

조선 말기의 무신, 애국지사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순우, 호는 강석으로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부사 승렬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875년 (고종 12년) 28세에 진주병사에 발탁되었다.

1883년(고종 20년) 전라좌수사, 이듬해 경상우병사, 1885년 금군별장을 거쳐 우포도대장에 임명되었는데, 이 무렵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던 유길준을 연금 형식으로 보호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서유견문>을 집필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뒤 친군우영사, 상리국총판, 기기국총판을 거쳐 1887년에 형조판서와 한성부윤을 지냈고, 다시 우포장,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친군장위사, 연무공원판리사무를 차례로 역임한 뒤, 1894년 총어사, 1896년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재판장에 임명되어 사법집행의 공정을 기하려고 노력하였다.

독립협회가 결성되자 그 활동에 호의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1898년에는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의 열기가 고조되는 속에 중추원의장에 임명되고, 다시 법부대신으로서 고등재판소재판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정부의 탄압으로 만민공동회의 기세가 꺾이고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본직에서 해임되었다. 1901년 궁내부특진관에 이어 이듬해 다시 법부대신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찬정을 거쳐 1905년 의정부참정대신이 되어 내각을 조각하였다.

이 해에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끝까지 앞장서서 반대하였고, 일제의 갖은 협박에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창덕궁의 수옥헌 골방에 감금당한 채 면직당하였다. 1910년 국권침탁 후에는 일본정부에서 남작의 작위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이후 칩거생활을 하다가 1920년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하고 이를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켰다.

아들 한양호가 서울여상을 설립하였으며, 증손자인 한상우에 이르기까지 8대를 계속해서 은평구 응암동에 거주하였다.

한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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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최종수정일2022.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