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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표

원두표(1593(선조 26년)~1664년(현종 5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원주, 자는 자건, 호는 탄수, 탄옹, 박지계의 문인이다. 광해군의 정치가 점점 문란하여 지자 의사들과 인조반정 모의에 협찬하였고, 반정이 성공한 뒤에는 그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고 원평부원군에 봉하여졌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전주부윤이 되고, 나주목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636년 에 일어난 병자호란 당시 어영부사로서 남한산성을 지키고, 1642년 형조판서로 승진되었으며, 뒤이어 강화부유수,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 동안 에 서인 중 공서에 속하여 청서를 탄압하다가 같은 파에 속한 김자점과의 정권다툼으로 분당하여 원당의 영수가 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호조판서로 있다가 한때 파직 당하였고, 1651년에는 좌참찬, 좌찬성을 지냈으며, 1654년 병조판서가 되어 김육이 적극 추진하려는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동시에, 역시 김육에 의하여 추진된 동전 유통 보급방법을 논의하는데 참여하였다.

인조반정에 참여하기 전, 즉 광해군때 지금 은평구 불광동 산 42번지와 280번지 일대의 독박골에 은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원두표가 젊은 시절에 독바위골에서 은거하였는데, 동네 나무꾼들이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오?” 하고 물으면 “염병이 걸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병을 고치러 왔소.” 라고 대답해서는 사람들의 점근을 막고 이곳에서 반정을 모의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조반정 당시 “이제 병 고치러 가세.”라는 말이 거사의 암호로 쓰였다고하고, 반정이 성공한 뒤에 인조가 원두표의 공을 치하하면서 “내가 그대의 덕을 입었다.”고 하였으므로 그가 은거했던 바위골을 ‘덕이 있는 바위골' 이라는 뜻에서 덕바위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지금 독바위골 또는 독박골로 변했다는 것이다.

원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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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최종수정일2022.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