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

희빈장씨

희빈장씨(?~1701년(숙종27년))

조선 숙종의 빈으로 본관은 인동, 역관 장현의 종질녀이다. 어머니의 정부 조사석과 종친인 동평군 항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 하였다.

1686년(숙종12년) 숙원이 되고, 1688년 소의로 승격되어 왕자 전을 낳게 왕은 기뻐하여 세자로 봉하려 하였으나 송시열등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들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하였다.

이어 서인의 노론, 소론 은 모두 아직 왕비 민씨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듣지 아니하고 1689년 정월에 세자를 봉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승격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세자를 봉함이 아직 이르다고 상소하자, 왕은 이미 명호가 결정된 다음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진노하므로, 남인 이현기, 남치훈, 윤빈 등이 송시열의 상소를 논박하며 파직시켜 제주도로 유배하게 하고 다시 사사하게 하였다.

이 밖에 서인의 영수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하지 못하였고, 반면에 남인의 권대운, 김덕원 등이 등용되었다. 이 정권의 교체를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이해 5월에 다시 민비를 폐하고 장희빈을 올려 왕비로 삼으려 할 때 서인 오두인, 박태보 등 80여명이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도리어 참혹한 형문을 받게 되니 이후 정국은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던 중 1694년 서인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폐비의 복위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 때에 남인의 영수요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민암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혀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이 때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사를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내렸는데 이것을 갑술옥사라고 한다. 또한, 이미 죽은 송시열, 김수항 등은 복작되고 남인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나게 될 때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희빈에게 보내 서장 속에 폐비 민씨에 관한 문구가 논쟁이 되어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세자에게 화를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 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하였다.

그런데 뒤에 왕비 민씨가 죽은 다음에 장희빈이 취선당 서쪽에다 신당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 일에 관련된 희빈과 장희재는 살해되고 궁인, 무녀, 그 족당도 화를 입게 되었다. 이것을 무고의 옥이라 하는데, 이 때 장희빈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취한 남구만, 최석정, 유상운 등 소론의 선비들도 몰락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빈을 후비로 승격하는 일을 없애는 법을 만들었다.

희빈 장씨의 생가가 현재 은평구 불광동의 은혜초등학교 부근 아미산 기슭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생가터는 희빈 장씨의 아버지인 옥산부원군 장경의 묘와 함께 인동 장씨 후손들에 의해 잘 보존되고 있다가 1970년대에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의 매봉산 기슭으로 묘소와 신도비 등이 이전되었다.

아미산은 꼭 나방의 눈썹같이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희빈 장씨의 아버지 장경의 묘을 이곳에 쓰고부터 희빈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인동 장씨 일문의 권세가 한창일 때 벼슬하는 사람들이 이 곳을 자주 왕래하였다 하여 동네 이름을 관동이라 하게 되었다고 하며, 현재 불광동 시외버스정류장에서 연신내로 넘어가는 데 있는 고개를 관티고개라고 하는데, 조선 숙종 때 희빈 장씨의 당숙인 장현이 문중의 어른으로서 이 곳에 살고 있었으므로 관직을 청탁하려는 사람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어 다녔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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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최종수정일2022.01.23